그가 모는 1014번 지선버스는 서울 정릉을 출발해 아리랑 고개 →보문역→동대문 운동장→성신여대입구를 거쳐 다시 정릉으로 돌아온다.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초록색 버스. 하지만 그의 버스는 특별하다.
“안녕하세요, 천천히 올라오세요.”
오후 12시 35분. 차고지인 정릉 문바위 고개를 출발, 첫 정류장에 도착했을때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손님 자리에 앉으세요. 앉기 전에는 출발하지 않습니다. 한 정류장을 가더라도 이 차에서는 편안히 앉아서 가십시오.”
우씨는 룸미러를 통해 승객이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 한 후에야 엑셀레이터를 밟기 시작했다.
“좌회전 깜빡이 넣고 천천히 출발하겠습니다.”
버스의 방향을 바꿀때도 친절하게 미리 안내를 한다.
정릉시장 입구에서 한 승객이 정차 버튼을 눌렀다.
“버튼이 멀리 있으면 굳이 버튼을 누르려 일어서지 말고 그냥 ‘아저씨 세워 주세요’ 하고 말하세요. 절대 운행 중에 일어서지 마세요. 이 차에서는 내릴 때까지 엉덩이를 의자에 꼭 붙이고 계십시오.”
버스는 성신여대 입구를 향해 달렸다.
“차가 완전히 정차하기 전에는 일어서지 마십시오.”
하지만 한 여성 승객이 버스가 완전히 멈춰서기 전 자리에서 일어서 뒷문을 향해 갈 움직임을 보였다.
“아가씨, 차가 완전히 설 때까지 일어서지 말라고 했잖아요. 공주님같이 품위 있게 차가 완전히 서거든 나오세요.”
그러나 이 여성 승객은 우씨의 말에 아랑곳 않고 뒷 문 앞에 가 섰다.
“아가씨, 다음에는 이 차 타지 마세요. 이 차는 품위 있는 손님만 모시겠습니다.”
미스코리아대회 참가자 처럼 비음을 섞어 말 꼬리를 살짝 올린 우씨의 농담에 승객들의 입에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나왔다.
“바쁘면 운전자가 바쁘지 왜 손님들이 바쁩니까. 이젠 버스도 품위 있게 타세요. 여러분이 완전히 앉으면 출발할 테니 여러분도 품위 있게 앉아 계시다 차가 완전히 선 뒤에 품위 있게 내리세요. 친절하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우씨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이번 정류장은 동대문 운동장입니다. 지하철 4,5호선을 이용하실 분들은 이곳에서 하차 하세요. 그리고 지하철을 타시거나 버스를 갈아탈 분들은 내리기 전에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한 번 더 찍어야 요금할인을 받습니다. 단말기에서 ‘감사합니다.’란 말이 나와야 정상적으로 처리가 된 겁니다.”
1014번은 신설노선이라 아직 안내방송 테이프가 준비되지 않았다. 우씨는 모든 안내를 육성으로 대신했다.
틈나는 대로 교통카드 사용법이나 환승요령 등 승객들이 궁금해 하는 새로운 버스 시스템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립 서비스’뿐만이 아니었다. 우씨의 버스는 철저하게 신호를 준수했다. 급정차나 급출발도 하지 않았다. 정차할 때는 버스 정류장 옆으로 최대한 붙였다.
아무데나 비집고 들어오는 오토바이가 하차하는 승객과 충돌 사고를 일으킬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1014번 버스의 운행구간은 13.821km로 길지 않다. 하지만 버스 중앙차로를 이용하지 못하는데다 청계천등 상습 정체구간이 많아 한 바퀴 도는데 보통 1시간 50분이나 걸리는 ‘느림보’다.
“이 노선은 차가 많이 밀립니다. 그래서 손님들이 원하는 도착 시간을 맞춰 드릴 수가 없습니다. 배차 간격도 들쭉날쭉해 손님들이 짜증을 많이 내십니다. 그러나 제 힘으로는 해결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최대한 친절하고 안전하게 손님들을 모시자.”
그의 ‘친절버스’는 서울시의 대중교통체계 개편 첫날인 7월1일부터 본격적인 운행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그동안 시내버스는 승객에 의존하는 수입구조때문에 상당수 과속이나 난폭운전을 일삼았다.
우씨도 가서는 안 될 차선으로 버스를 급하게 몰고 간 뒤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끼어드는 ‘찔러박기’나, 도로 한가운데서 승객을 하차시키는 불법을 수시로 했다. 배차간격을 맞춰야 했기 때문. “처음 버스를 몰 때 한 달가량 지금처럼 했어요.
그랬더니 앞차와의 간격이 40분씩 벌어지는 거예요. 난리가 났죠. 그때부터 속도를 내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며 운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1일부터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회사에 대해 승객수가 아니라 1대당 적정 운송수입을 산정, 배분하는 수입금공동관리제가 시행된 것.
수입금공동관리제는 버스 회사가 저마다 수입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 등이 공동운수협정에 따라 버스 노선별로 적정이윤을 포함한 총 운송비용을 산정, 회사에 수입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운행 적자는 시가 보전해 준다.
버스회사가 운전기사에게 무리한 운행을 요구할 일이 사라진 것.
그렇다고 해도 우씨 같은 버스기사를 만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동료 기사들은 “지나치게 친절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자신들은 아직까지 승차하는 손님을 향해 “어서 오세요.” 정도의 인사를 건네는 수준인데 그 것도 “많이 발전 한 것”이라는 것.
버스는 성북구청을 지나 정릉 입구에 들어섰다. 시계바늘은 어느덧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차고지 근처라 그런지 우씨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단골 승객’이 더러 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떠들면 목 안 아파?” “괜찮아유~”. 정겨운 대화가 오고 갔다.
주부 곽인숙씨(45)는 “이런 버스기사는 처음 봤다”며 “진심으로 승객들을 보호해 준다는 느낌을 받아 너무 좋다”고 말했다.
오후 2시 20분. 우씨의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다.
몇 정거장 앞에서 탄 할머니 한분이 앞문으로 내리려다가 바지에서 뭔가를 꺼내 우씨에게 건넸다.
사탕이었다.
“우리딸 주려던 건데 기사양반이 너무 고마워서 주는 거야. 이 사탕 먹고 힘 내.”
친절을 푸는 것은 처음이 어색하고 멋쩍어서 그렇치 조금만 베고 나면 그보다 즐거운 것도 없읍니다. 짜증낼 필요도 신경 쓰면서 힘들어 할 필요가 없읍니다.